
| 제목 | 내식으로 다산읽기15 | |||
| 작성자 | 오두범(吳斗凡) [2025-03-02 11:40:4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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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두범의 내 식으로 다산(茶山) 읽기15- 다산경세학의 배경이 된 조선왕조의 말기적 현상3 풍양조씨의 세도(계속) 그러다가 왕위는 효명세자의 아들 즉 순조의 손자인 헌종(憲宗)에게로 이어졌다. 순조는 죽기 전에 조만영(순조의 사돈, 효명세자의 장인) 가문에 속한 조인영(趙寅永)에게 앞으로 왕위를 이을 헌종(憲宗)을 돌볼 것을 부탁하였다. 이런 가운데 8세의 헌종이 즉위하자 왕실의 제일 어른인 대왕대비 즉 헌종의 할머니인 인 김조순의 딸 순원왕후(純元王后: 순조의 부인) 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그러고 난 뒤 1840년에는 수렴청정이 거두어지고 그 뒤로 1849년까지 헌종이 친정을 했다.
그러나 이 친정은 허울 좋은 친정이었고 이번에는 헌종의 할머니 대신 헌종의 어머니 신정왕후(神貞王后) 조씨와 그의 일족 즉 풍양조씨가 권력을 휘두르는 양상이 되었다.
왕실에는 여자 어른이 두 명 있게 되었다. 대왕대비 안동 김씨 순원왕후(김조순의 딸)와 풍양조씨 왕대비 신정왕후(조만영의 딸)가 그들이다. 이렇게 됨으로써 헌종 재위 기간중 안동김씨 일파와 풍양조씨 일파간의 세력 투쟁이 심화되어 정국은 혼란 상태를 벗어날 줄 몰랐다. 강화도 나무꾼 왕 철종, 그리고 흥선대원군/고종 그러다가 헌종이 죽었다.(헌종은 23세로 단명하였다.) 헌종이 죽자 대왕대비 순원왕후는 강화도에서 농부로 살고 있던 왕족 원범(元範)을 국왕으로 선택해서 그가 철종(哲宗)이 되었고 김조순의 일문인 김문근의 딸이 철종비가 되었다. 이로부터 약 15년간의 김문근(金汶根) 중심의 세도 정치는 타락의 절정을 이루어 종실(宗室)이라도 이들에게 눌려 살았다.
이어 고종(高宗)의 생부로서 정권을 장악한 흥선대원군은 안동 김씨의 세력을 몰아내고 독재적 세도정치를 펴나갔다. 대원군은 외척의 대두를 경계하여 왕비의 간택에도 신중을 기하였으나 10년만에 명성 왕후에 의해 실각한 뒤로 한말까지 여흥 민씨 일족에 의한 세도정치가 계속되었다. 정조가 돌아가시고 순조가 즉위한 이후 조선은 세도 정치등 파행적인 정치구도 속에서 지배층의 대립은 더욱 격화되었다. 이러한 정치구도는 조선후기의 정치, 경제, 사회의 전반을 근본적으로 뒤흔들어 놓음으로써 민생을 도탄 상태에 몰아넣고 말았다. 그 결과 조선 사회가 크게 동요하였다. 그러나 정부인사들은 그러한 위기를 인식하지 못했으며 개혁이나 변동을 기피하거나 저지하는 입장이었다. 조선말기의 조정은 사회적 모순을 시정하기는커녕 그 모순에 편승하여 자기의 권좌를 지키기에 오직 혈안이 되어 있을 뿐이었으며 따라서 삼정(三政)의 문란 등에 대하여 속수무책일 뿐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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