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제목 | 다산 정약용의 발칙한 상상8 | |||
| 작성자 | 오두범(吳斗凡) [2025-05-04 10:44:4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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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의 발칙한 상상8 중간 해설 조선의 선각자 정약용- 일본의 선각자 후꾸자와 ‘선각자’라는 의미에서 정약용을 생각할 때 거기에 연관되어 생각나는 일본의 선각자가 있다. 후꾸자와유끼지(福澤諭吉)라는 인물이 그인데 두 사람을 연관시켜 이해하는 것이 정약용 이해에도 큰 도움이 될 것 같아 여기 소개한다. 조선의 선각자(先覺者) 정약용은 1762년에 태어나서 1836년 75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일본의 후꾸자와는 1834년에 태어나서 1901년 68세의 나이에 졸하였다. 타임 시리즈로 생각하면 조선에서 정약용이 75년간 생존했던 시기의 바톤을 일본의 후꾸자와가 이어받아 다시 68년간 살았던 것이다. 후꾸자와 유끼지는 일본 메이지 시대의 계몽사상가이다. 일본에서는 1868년 도쿠가와[德川]의 막부시대가 종식되고 메이지 유신이 시작되었다. 이때는 후꾸자와가 35세 때인데 이때 이후 즉 일본 메이지 시대, 계몽사상가로서 그는 민간인으로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일본화폐 1만엔 짜리에 그의 초상이 올라있다) 후꾸자와는 1854년 그의 20세 때 나가사키에서 난학(蘭學: 네델란드어)을 배우고 1858년 에도(도쿄)에 난학숙을 열었다. 1860년 막부의 견미(遣美)사절 수행원, 1861~1862년 유럽 6개국 파견 사절, 1867년 견미사절 등으로 미국과 유럽을 각각 순방, 새로운 서구 문화를 흡수하고 돌아와 일본 봉건 관료주의에 대항하였다. 마침 1868년에 도쿠가와 시대가 막을 내리고 메이지 시대의 문이 열리지 않았다면 [조선처럼, 봉건왕조시대 세도정치, 노론세력 지배가 계속되었다면] 후꾸자와도 봉건 관료주의에 숨통이 막혀 죽었거나 귀양형에 처해졌을 것이다. 다행히 메이지 시대가 열려 그는 계몽 사상의 꽃을 피울 수 있게 되었다.
그는 1869년 세계 각국의 역사와 정치제도를 소개한 『서양사정』을 간행하여 일본사회 전반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일본에서의 후꾸자와 유끼지의 『서양사정』은 조선에서 미국인 호머 헐버트(Homer Hulbert)가 1889년에 『사민필지』를 저술하여 세계 각국의 역사와 정치 제도 등을 소개한 것보다 20년 앞선다. 일본에서는 한국보다 20년전에 서양 사정이 소개되었고, 한국에서는 서양 사람이 와서 서양 사정을 소개해 주었는데 일본에서는 남의 힘을 빌지 않고 자기 나라 사람에 의하여 서양 사정이 소개되었다. 이것이 국가 발전과 개화에 있어서의 한국과 일본 사이의 격차가 되었다. 조선도 일본처럼 1868년쯤에 개화시대(開化時代)가 열렸다면 그보다 30~40년 후에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기는 일도 없었을 것이고 그에 따라 서양사람 (미국세력)에 의해 국운이 좌우되는 불안한 대한민국이 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에 비하여 정약용은 선각자로서 복택유길(福澤有吉)보다 73년전에 조선의 왕조정치가 그 구차한 명맥을 강고히 이어가고 있던 시대에 태어났으니, 결국 그는 계몽사상의 씨앗을 마음속 깊이 품고는 있었으나 싹을 틔우지 못하고 계몽사상(서학:천주교)을 배교하고 구체제인으로 회귀할 수밖에 없었다.
꿩대신 닭이랄까 계몽사상의 꽃을 피우지 못할 바에는 구체제 내에서의 소극적 개혁이라도 고안하고 시도해 보자는 꿈을 품고 시작한 것이 그의 『경세유표』의 저술이었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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