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제목 | 한천당유고(寒泉堂遺稿) | |||
| 작성자 | 관리자 [2021-07-06 17:11:0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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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천당 유고는 보성오씨 한천당 오재정(1641-1709)의 문집으로 여기에는 오재정의 장조카 오정기(1660-1734)의 행적에 관한 기록이 있습니다. 오정기는 오씨족보 연구에 중요한 인물로 나주오씨족보 정묘보(1747년) 오씨래동문적기 (吳時鼎)에 오정기의 이름이 나오는데 오씨래동문적기에 따르면 1747년 이전에 작성된 보성오씨 구보舊譜를 오정기가 소장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족보연구에 관심 있는 분은 보성오씨 대종회에 문의하여 오정기 후손를 만나 보성오씨 구보에 대해 알아보시길 바랍니다 . 보성오씨 구보는 보학연구에 대단히 소중한 자료입니다. 또한 경기도 성남시 분당에 있는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진흥사업단(전화번호 : 031-730-8225, 대표번호 : 031-730-8111 )을 방문하여 한천당유고도 열람하시길 바랍니다. [나주오씨족보 정묘보(1747년) 오씨래동문적기 내용중 일부분] (중략) --또 족제 세주(族弟世胄)가 기록(記錄)한 것을 보면 기유년(己酉年) 여름에 충청도(忠淸道) 문의(文義) 삼기리(三岐里)에 사는 오영기(吳英基)의 역전(歷傳)에 문의현 덕화면(文義顯 德化面)에 사는 오정기(吳鼎基)집에 보성오씨(寶城吳氏) 족보(族譜)가 있으니 그 족보(族譜) 가운데 휘 숙규(諱 淑珪)와 숙환(淑環) 형제(兄弟)가 있고 또 중랑장휘(中郞將 諱)가 있다고 하니 합(合)하여 볼진데 동방 오씨(東方吳氏)성관(姓貫)이 비록 다르나 시조(始祖)는 한사람이란 설(說)이 망령돤 설(說)이 아닌것 같다.--(중략) ---------------------------------------------------------------------- 한천당유고(寒泉堂遺稿) [보성오씨 한천당(寒泉堂) 오재정(吳再挺,1641∼1709)의 문집] 본문 寒泉堂遺稿序 (序1) 1906. 宋秉瓚이 쓴 서문이다. 오재정의 孝友에 대해 높이 평가하고 있다. 아울러 그가 송시열의 문하에서 명망이 있었던 점을 특기하고, 오재정의 7세손 聖秀가 서문을 부탁하여 글을 짓게 되었다며 작성 동기를 밝히고 있다. 跋文 (序2) 오재정의 7세손 正秀가 지은 발이다. 본래 저자의 유고는 상당한 분량이었으나 관리 소홀로 모두 잃어버리고, 근래 族兄 聖秀가 이를 한스럽게 여겨 수소문한 끝에 시문 약간 편을 宗族姻友의 집에서 구하여 간행하게 되었다고 적고 있다. 卷一 詩 九巖銘, 松峴齋舍八景, 附次韻-延時萬, 前韻-洪宅相, 贈吳衡老六首-並序, 詠博, 俗離水晶峯, 石門, 羅漢殿滯雨, 雲藏臺, 浮屠臺, 鷄龍白蓮菴, 登上峰, 儒城途中口號, 輓族叔知非窩-翰國-二首, 挽族叔進士八擧-彦國, 挽申君 宗契立儀序 (7) 宗契를 맺게 된 경위와 종계의 취지를 설명한 서문이다. 孝悌之行과 敦睦之誼의 가풍이 시들해지고 宗儀를 의논하는 일이 폐지된 상황에 직면하여, 조상을 받들고 친척끼리 화목하게 지내는 도리를 추구하기 위해 종계를 결성했다고 적고 있다. 또한 문중에서 행해야 할 宗儀로 먼저 奉先克敬之道를 들고 다음으로 吉凶慶弔之禮를, 마지막으로 會同歡好之情을 들고 있으며, 끝에 宗約을 수록하였다. 宗約罰條 (10) 종약을 어길 경우 가해지는 벌을 규정한 조항. 위약 시 벌을 주는 경우를 크게 3가지로 나눠 규정하고 있다.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는 자, 조상을 받드는데 不敬한 자, 형제 사이에 싸우는 자, 서자로서 적자를 능멸하는 자 등은 上極罰에, 친척과 화목하지 않는 자, 연소자로서 연장자를 능멸하는 자, 正妻를 박대하는 자, 환난을 구제하지 않는 자 등은 上中罰에, 원한을 품고 복종하지 않는 자, 會日에 늦게 도착하는 자, 坐中에서 시끄럽게 떠드는 자, 講信에 참여하지 않는 자 등은 上下罰에 처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宗儀八條 (11) 종족 사이에 지켜야 할 儀範을 8개 조항(尊祖・重譜・・睦族・修墓・講儀・賻贈・明分・規責)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守分堂墓表 (16) 1689. 오재정이 조부 吳尙健(1590∼1657)을 위해 지은 묘표. 먼저 조상의 家系를 나열한 뒤, 오상건이 親喪을 당했을 때, 지나치게 슬퍼하여 고치기 어려운 병에 걸릴 정도였다고 하였다. 이에 鄕黨에서 오상건의 효를 칭찬하거나 그의 덕에 감화되지 않는 이가 없었다며 그의 효심을 기리고 있다. 贈嘉善大夫工曹參判吳公墓表陰記 (17) 1700. 宗人인 吳繼宗(1574∼1649)의 陰記로 오재정이 지었다. 오계종이 병란 중에 연이어 부모상을 당했음에도 장례와 제사를 정성을 다하여 극진히 치렀고 형제가 먼저 죽었을 때에도 몹시 애통해하였을 정도로 志行이 높았다. 오계종의 지행이 세상에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그의 내외 玄孫이나 曾孫들이 지금 귀하게 되고 융성하게 되었으니, 보답을 받은 것이라고 하며 그를 추모하였다. 祭知非窩-翰國-進士-彦國伯季文 (19) 1707. 오재정이 族叔인 知非窩 吳翰國과 進士 吳彦國의 영전에 바친 제문. 두 사람이 어려서부터 재주와 학문이 훌륭했으나, 뜻을 펼치지 못하고 죽은 것을 안타까워하였다. 두 사람의 獨子들이 각각 고아가 되었으나 仲氏가 애석하게 여겨 기르고 있으니 그들의 영혼이 지하에서 위로를 받고 있을 것이라고 하면서 슬픈 심정을 토로하였다. 喪禮問答-上尤菴先生 (20) 喪禮에 대해 오재정이 묻고 스승인 송시열이 답한 것을 기록한 것으로 대화체 형식이다. 葬事를 지낸 뒤에 치르는 여러 제사들을 거행하는 방식과 절차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卷二 遊俗離山錄 (1) 1693. 속리산을 유람한 것을 기록한 기행문. 癸酉年(1693) 음력 9월 초순에 오재정이 족숙인 子輝, 子方, 子强 및 그의 형제들과 같이 길을 떠나 산행을 시작하였다. 도중에 崔瑩 장군(1317∼1388)이 말을 길렀다고 하는 畜馬處와 그가 쌓았다고 전해지는 臺를 지나 象賢書院에 들러 瞻拜하고 기이한 봉우리들과 단풍 등을 관람하며 法住寺에 도착했다. 법주사 경내를 관람한 뒤, 水晶峯, 天皇峯 등을 유람했고 雲藏臺에 올라 솔잎만 씹으며 참선하고 있다는 승려들을 만나기도 하였다. 운장대를 내려와 世祖와 관련된 유물이 남아 있는 福泉庵과 高麗太祖 王建과 관련된 이야기가 전해오는 烏頂山城 등을 유람한 후, 하산하여 重陽에 글쓰기를 마쳤다고 하면서 글을 맺고 있다. 遊鷄龍山錄 (11) 1693. 오재정이 癸酉年(1693) 음력 10월 13∼20일에 계룡산을 유람한 것을 기록한 기행문. 오재정은 음력 10웡 13일에 朴會一과 함께 길을 떠나 14일부터 산행을 시작했다. 우선 己卯士類의 한 사람인 申遵美(1491∼1562)가 遊息했다는 翰林亭을 거쳐 神院寺를 관람하고 여러 암자도 들러본 후, 太祖 李成桂가 재위 중에 朝鮮의 도읍으로 정하고 공사를 했던 터가 남아있는 薪都를 유람했다. 그 뒤 岬寺와 洞鶴寺, 元曉臺와 義相臺 등을 돌아보며 여러 禪僧들을 만나 토론하기도 하고 毗盧峯 등의 경치와 계룡산의 단풍도 감상한 후 하산했다. 上院庵으로 올라갈 때, 동행한 승려 省元이 데리고 있던 16살 중을 만나 그가 어려서 부모를 잃고 형제도 없다는 말을 듣고, 환속하여 대를 이어 부모의 공덕을 높이는 것이 孝라는 의견을 개진하기도 하고, 남매탑에 얽힌 전설을 듣고 허황되고 터무니없는 이야기라고 치부하는 등 유교적 관념을 뚜렷이 드러내었다. 끝부분에서 계룡산의 경치는 관람하기엔 부족하지만 산세는 기이하고 험하여 산성을 쌓을만하다고 평가하였다. 遊三角山錄 (24) 1696. 오재정이 丙子年(1696) 음력 3월 16일과 17일에 걸쳐 삼각산(즉, 北漢山)을 유람한 것을 기록한 기행문. 오재정은 아우 原仲 등 총 16명과 함께 3월 16일에 길을 떠나 蕩春臺, 獅子項, 文殊寺 등을 유람한 뒤 문수사에서 점심을 먹었다. 다시 길을 떠나 普薩峯, 中興寺, 露積峰, 印信峰, 萬頃臺, 白雲臺를 들러보았다. 직접 가보지는 못하고 바라본 곳은 서쪽으론 祥雲菴, 동쪽으론 道峯山이다. 도봉산 아래엔 趙光祖(1482∼1519)와 송시열의 사당이 있다. 다음 날 17일에 동쪽에 있는 北漢山城의 城堞을 답사한 뒤 돌아왔다고 하였다. 이 기행문은 위 두 기행문과는 달리 첫 부분에서 동행인들의 이름을 나열한 후, 여정만을 짧게 기록하고 마무리 짓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卷三 挽詞二首 (1) 오재정의 영전에 바친 만사로 실제로는 2수가 아니고 友人인 商山 朴萬有, 族人 進士 吳斗春, 知己 李以重, 光山 金萬耆 등의 만사 4수가 실려 있다. 祭文 (2) 1709. 오재정의 영전에 바친 제문으로 友人인 商山 朴萬有, 族人 吳潤國, 사위 池性澈, 9촌 조카 吳郎遠, 宗下侍生 吳斗徵 및 吳斗重, 조카 吳鼎基, 조카 吳胤基 등이 지은 제문 7편이 실려 있다. 祭文 (15) 1710. 오재정의 영전에 바친 제문으로 族人 吳尙國이 지었다. 祭文 (16) 1711. 오재정의 영전에 바친 제문으로 宗下 吳斗夏가 지었다. 松泉齋舍記 (18) 1700. 오재정이 松泉齋舍를 세운 내력과 취지에 대해 그의 벗인 商山后人 朴萬有가 지은 齋舍記. 오재정의 先子가 三岐의 松泉에 齋舍를 지으려다 못 이룬 것을 오재정이 짓게 되었음을 밝히고 繼志述事가 孝의 大者임을 강조했다. 泉石의 勝地에서 행실을 닦아서 깨끗하게 함이 송천재사를 세우게 된 취지임을 밝히며 끝을 맺었다. 三岐齋舍鄕飮禮執事錄序 (20) 三岐齋舍에서 열린 鄕飮酒禮의 집사록 서문으로 이 행사에 衆賓으로 참여했던, 오재정의 조카 吳鼎基가 쓴 것이다. 오정기가 京城에서 송시열에게서 吉凶 등의 百禮 등에 대해 가르침을 받고 나서 禮를 연습해보려고 숙부 오재정 등과 의논하여 設行하게 되었음을 밝히고, 향음주례가 鄕人이 감흥하고 예를 익히며 道에 들어가는 門이라며 그 의의를 천명하였다. 말미에 향음주례에 참가한 이들의 이 의식에서의 위치와 역할을, 主人 오재정을 필두로 하여 적어 놓았다. 同門人錄 (22) 송시열의 문하생 177명의 명단. 송시열의 수제자 權尙夏(1641∼1721)를 필두로 하여 閔鼎重(1628∼1692), 李端夏(1625∼1689), 李喜朝(1655∼1724), 오재정 등을 수록했는데, 인명 다음에 작은 글씨로 해당 인물의 字, 號, 諡號, 官職 등을 적어 놓았다. 卷四 遺事 (1) 오재정은 송시열 문하에서 학문을 배우고 修身하여 誠孝奉先에 힘쓰는 한편, 齋室을 세우고 宗約을 만들었다. 큰조카 吳鼎基와 함께 三岐에서 鄕飮酒禮를 베풀었다. 또한 봄가을에 墓室에 宗族을 모이게 하여 花樹會를 열었다. 여기에서 가문의 어린이들에게 小學으로 五倫의 次序를 가르치며 강론하였다. 그리고 종족을 거느리고 조상의 묘소에 가서 拜謁하여 예의를 알게 하고 笏記에 따라 祭禮를 모두 치른 후에 종족에게 오늘의 모임이 단지 講學만을 위한 것이 아니고, 조상을 받들고 族人들과 친목을 다지기 위한 것임을 강조하여 말했다. 行狀 (2) 1897. 宗後生 吳正鎬가 쓴 오재정의 행장. 먼저 오재정의 先世의 家系를 서술하고 송시열에게 학문과 예를 배운 후, 선세의 뜻을 이어 松泉齋舍를 세우고 花樹會와 鄕飮酒禮를 설행한 그의 행적을 기술하였다. 뒷부분에서 오재정의 후손들을 소개한 뒤, 그가 빼어난 자태와 학덕이 있어 세상에 보탬이 되고 백성을 이끌어 士林의 모범이 될 만했으나, 입신출세하지 못하여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았음을 안타까워하였다. 덧붙여 오정호 자신은 少時에 宗兄 집에서 寒泉堂本集을 읽은 적이 있었는데, 吳聖秀가 갖고 와서 보여준 寒泉堂集錄과 松泉集錄이 자신이 본 것이 아니었고, 원집이 여러 곳에 흩어져 있다는 말을 듣고 근심하였다. 이런 상황을 애석히 여겨 송천집록 중 사실인 부분을 모으고 초고를 지어 간략히 윤색을 가하되, 정도에 지나치는 말은 한 마디도 넣지 않았음을 밝혔다. 墓誌銘-並序 (7) 1898. 完山의 監役 李克善이 작성한 오재정의 묘지명 並序로 앞의 행장과 그 내용이 대부분 같다. 墓碣銘-並序 (9) 1898. 前承旨인 宋秉玉이 짓고, 역시 전 승지인 宋秉學이 글씨를 쓴, 오재정의 묘갈명 並序로 앞의 행장, 묘지명과 그 내용이 대부분 비슷하다. 松泉八景詩序 (11) 1900. 오재정의 7세손 吳聖秀가 쓴 것으로 松泉 일대에서 풍광이 좋은 여덟 곳에 대해 노래한 絶句 8수에 대한 서문. 立碑日記 (12) 戊戌年(1898)에 前承旨 宋秉玉에게서 墓文을 받아 己亥年(1899)에 오재정의 무덤 앞에 비석을 세우게 된 과정에 대해 적은 일기로 그의 7세손 吳聖秀가 썼다. 松泉九曲修刻雜記 (15) 1899. 松泉의 九曲에 바위를 수리하여 글자를 다시 새기게 된 상황에 대해 오재정의 7세손 吳聖秀가 기록한 잡기. 八鳳山 남쪽 三岐 서쪽에 구곡이라 이름 붙인 鏤石이 있으니, 進學巖, 釣漁巖, 待月巖, 望仙巖, 偸閒巖, 繼述巖, 濯纓巖, 尙志巖, 歎逝巖 등이 그것이다. 이것은 오재정이 그의 큰조카 吳鼎基와 함께 武夷, 石潭의 故事를 추모하고 본받아 새긴 것이다. 그런데, 오재정이 죽은 지 거의 2백년 가까이 되어 글자가 새겨진 돌이 떨어지거나 깨어지고 닳아 없어져 계술암과 탄서암의 글자만이 남아 있는 바, 石工을 불러 수리하여 다시 글자를 새기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팔봉산의 산세와 그 주위에 있는 오재정과 그 아들들의 묘의 위치 등에 대해 설명한 후, 구곡의 흐름을 긴 뱀이 노니는 것에 비유하고, 직접 구곡의 바위를 답사하면서 바위들 사이의 步數를 꼼꼼히 기록하고 바위들의 기괴함을 묘사하였다. 다음으로 將軍峯 아래에 있는 東西齋宮과 선조들의 묘와 墓室 등을 두루 살펴본 후, 현재 岐陽齋가 원래는 松泉齋였음을 밝히고 있다. 宗儀八條後小識 (20) 1900. 宗儀八條의 後小識로 오재정의 7세손 吳漢秀가 지었다. 오한수는 오재정에 대한 제문이나 宗儀小識에 언급된 말을 근거로 宗儀八條는 松峯 吳益升(1620∼1679)과 오재정이 明代 초기 正學者인 方孝孺(1337∼1402)가 행한 古儀를 본떠 만들어 전해져 내려온 것이 확실한 바, 자손이나 宗族들은 이것을 지켜서 행해야 할 것이라고 역설하였다. 立碑告由文 (21) 1900. 前承旨인 宋秉玉이 짓고, 전 승지인 宋秉學이 글씨를 쓴, 오재정의 墓碣銘을 돌에 새겨 비석을 세운 연유를 밝힌 告由文으로 그의 8세손 吳熙福이 지었다. 跋文 (22) 吳聖秀 등의 노력으로 오재정의 시문집 유고를 찾아내어 인쇄하게 된 데 대해 감회를 밝히면서 그를 추모하는 발문으로 그의 8세손 吳熙豊이 지었다. 跋文 (22) 寒泉堂遺稿의 간행에 즈음하여 오재정의 학문과 행적 등을 추모하는 발문으로 그의 8세손 吳熙奭이 지었다. 後跋 (24) 1906. 오재정의 방계 6세손 吳淵黙이 지은 後跋. 오재정이 평소에 보여준 행적과 인품 등을 기리고, 그의 墓碣文과 寒泉堂遺稿의 序文이 지어진 경위를 간략하게 기술하였다. 後跋 (25) 오재정의 宗後孫 吳寧鎬가 지은 後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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