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 | 내식으로 다산읽기2 | |||
작성자 | 오두범(吳斗凡) [2024-12-19 10:09:59] | |||
첨부파일 |
첨부된파일갯수 : 0개 |
|||
오두범의 내 식으로 다산(茶山) 읽기2 다산의 생애2 정약용은 1783년(정조7)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여 경의 진사가 되어 (성균관 등에서 수학) 어전에서 『중용(中庸)』을 강의하였다. 1784년(정조8) 큰 형 정학현의 처남 이벽(李檗)에게서 서학(西學)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서적을 얻어 읽기도 하면서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1789년(정조13, 28세시) 식년 문과(式年文科) 갑과(甲科)에 급제하여 가주서를 거쳐 검열이 되었으나 가톨릭 교인이라 하여 탄핵을 받고 해미에 유배되었다. 10일만에 풀려 나와 지평으로 등용되고 1792년 수찬으로 있으면서 서양식 축성법을 기초로 한 성제(城制) 와 기중가설(起重架設)을 지어 올려 축조중인 수원성 수축에 기여하였다. 1797년 동부승지(同副承旨)가 되었으나 청나라 신부 주문모(周文謨)의 잠입 사건에 둘째 형 약전(若拴)과 함께 연루되어 금정도 찰방(金井道察方)으로 좌천되었다가 규장각의 부사가 되어 다시 상경하였다. 규장각의 부사였을 때 유득공(柳得恭), 박제가(朴齊家) 등과 함께 편찬 사업에 참여하였다.
이어 승지에 올랐으나 모함을 받자 자명소(自明疎)를 올려 사의를 표하였다. 그 후 곡산부사(谷山府使)로 있으면서 치적을 올렸고, 1799년 병조참의가 되었으나 공서파(攻西派)로부터 천주교 신봉자로 다시 모함을 받자 사직하였다. 그러다가 정조가 돌아가시고 순조(純祖)가 즉위한 후 신유박해(辛酉迫害)때 경상도 포항 부근에 있는 장기로 유배되었다. 이후 그 해 발생한 ‘황사영 백서(黃嗣永帛書) 사건’의 여파로 다시 문초를 받고 전라도 강진(康津)에서 유배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는 이 강진 유배 기간 동안 경세학(經世學)과 경학(經學) 연구에 매진했고 이를 자신의 실학적 학문을 완성시킬 수 있는 기회로 활용하였다.
그의 강진에서의 유배 생활은 18년 간 계속되었다. 1818년 그가 57세 되던 해에 이태순(李泰淳)의 상소로 유배에서 풀려나 1836년 생을 마감할 때까지 경기도 조안면 그의 향리에서 지냈다. 이 시기에 향리에 은거하면서 『상서(尙書)』등을 연구했으며, 강진에서 마치지 못했던 저술 작업을 계속해서 추진했다. 『매씨서평(梅氏書平)』의 개정, 증보 작업이나 『아언각비(雅言覺非)』, 『사대고례산보(事大考例刪補)』 등의 저작 작업이 이때 이루어졌다.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