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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정평공 오승
작성자 관리자 [2021-07-06 09: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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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승(吳陞) 1364(공민왕13) - 1444(세종26) 

 
조선 초기의 문신. 자는 숭지(崇之). 시호는 정평(靖平). 아버지는 중화(仲和)이시다. 
처음에는 음보로 벼슬에 올랐으나 1382(고려. 우왕8) 진사. 생원시에 연이어 합격하고, 다음해 식년문과에 동진사로 합격하였다. 
 
숭정대부 판중추원사 예문관대제학 정평공 죽헌 오선생 신도비명 
崇政大夫 判中樞院事 藝文館大提學 靖平公 竹軒 吳先生 神道碑銘 
 
선생의 이름은 승(陞)이고, 첫이름은 제부(齊富)이다. 
자는 숭지(崇之). 호는 죽헌이요. 본관은 동복이다 
시조 영(寧)이 중환을 낳으니 호장(戶長)이며, 그가 대승(大陞)을 낳으니 고려시중 문헌공(文獻公)이며, 그가 광찰(光札)을 낳으니 대장군이고, 그가 선(璿)을 낳으니 시랑 문정공이며, 그가 잠(潛)을 낳으니 찬성사로서 귀성군(龜城君)에 봉하여졌고 시호는 문제(文齊)이며, 그가 선(僐)을 낳으니 찬성사로서 귀성군을 다시 이었고, 그가 중화(仲和 : 일명 仲華)를 낳으니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 )로서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검교참찬 문화찬성사(檢校參贊 門下贊成事)에 이르니 공의 선친이시다. 
모친은 안동권씨 대제학 부(溥)의 손자, 현복군(玄福君) 겸(兼)의 따님이다. 
공민왕 갑진(1364)에 공을 낳았다. 임술(1382)에 사마시에 두차례 급제하였고, 그 이듬해 문과(文科)에 태종과 함께 급제 함으로써 사간원 헌납이 되었고 전교부령(典校副令)으로 옮겨갔으며, 태조조에는 오랬동안 간관(諫官)에 있었다. 
태종 4년 갑신(1404)에 교지를 내려 문무백관으로 하여금 상소를 올리도록 허였는데, 이 때 공은 봉상령(奉常令)으로서 상소를 올려 관직이 복잡한 폐단에 대하여 논급하였다. 
그 해 10월에 지사간원사(知司諫院事)에 임명되었는데, 상소하여 이거이(李居易) 아들의 흉악한 범죄를 논급하였고, 11월에 상소를 올려 관제(官制)를 개정하도록 청하였다. 
그 후에 또 다시 상소를 올려 시무(時務)몇가지를 논술한 바 있다. 
1. 형옥을 정체하지 말 것. 
1. 백성들의 힘을 아껴서 쓸 것. 
1. 모든 벼슬을 임명할적에는 반드시 대간으로 하여금 고신을 서명하여 탐욕과 청탁의 폐단을 막을 것. 
1. 불교를 제재하여 부녀자들이 절에 찾아가는 것을 엄금할 것 등이다.   
태종은 이를 모두 허락 하였고, 
을유(1405) 정월에 다시 상소를 올려 유담의 관직을 삭탈해야 한다고 말하였는데 이의 윤허를 얻었다. (유담은 본디 요승 선명 인데 복술로써 총애를 얻은 자이다.) 
3월에 또 다시 상소를 올려 여관(女官)을 혁파하고 세도가의 집으로 달려가는 이들을 억제하라는 등등의 일을 청하였다. 태종은 그를 가상히 여겨 받아드렸다. 
5월에 상소하여 병조판서로 하여금 삼군총제(三軍摠制)를 겸임하도록 청하였고 병관(兵官)들의 사사로운 사냥을 금지하도록 하였으며, 
6월에 세자를 돕는 시학(侍學), 보덕(輔德)등 관리를 설치하여 항상 태자의 곁에 있으면서 모든일에 경계하도록 하였다. 
당시 태종이 가뭄으로 인하여 외전(外殿)에 나아가 조회를 보지 않아 공이 간언 하였다. “왕의 덕은 근면보다 더 훌륭한 것이 없다. 재앙을 만나 두려워한다면 더욱 몸을 삼가 수행하는 것으로 급선무를 삼아야 할 것이다. 청컨대 관아에서 날마다 조회를 보아 군신의 정을 통하고 하늘을 경외하며 백성을 위하여 근면의 의지를 보여 주어야 할 것이다. 
 
병술(1406) 7월 또 다시 상소하여 다섯 가지 일에 대하여 논하였다. 
1. 여러 공신들의 포상법은 이것만으로도 지극한 데 또 다시 상록(常祿)을두는 것은 지나친 것이다. 
2. 재상은 천직(天職)을 함에 다스리는 자이니, 반드시 인재를 가려서 임명해야 한다. 
3. 임금의 몸은 모든 정치의 근본이니, 동정(動靜)과 위의(威儀)를 삼가지 않을 수 없다. 
4. 각도의 토지는 새로 개간한 것 이 외에 개간한 밭들은 전안에 따라서 세금을 거두되 민심을 편안케 해야 할 것이다. 
5. 토목역사는 모두 중지하고, 또한 해마다 올리는 제목을 탕감하여 백성의 힘을 쉬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어 또다시 권근(權近), 이숙번(李叔蕃), 최유경(崔有慶), 유관(柳觀)은 정부에 등용할 인물로 추천하였고, 
안경공(安景恭), 이행(李行), 이래(李來)는 제조(諸曹)의 우두머리가 될만한 인물로 추천 하였으며, 
정홍(鄭洪), 함부림(咸傅霖), 정구(鄭矩), 이승상(李升商)은 일도의 감사가 될만한 인물로 추천 하였다. 
겨울에 우사간 대부에 임명되었고, 정해(1407) 정월에 좌사간대부로 승진하였다. 기축(1409)에 충청도 관찰사를 거쳐 신묘(1411)년 한성부윤에 임명되었고, 
4월에는 사신의 명을 받들어 명나라로 갔었는데 이는 춘추절(천자의 생일)을 축하하는 사신이었다. 
1414년 경기도 관찰사에 임명되었는데 내외의 의복 한 벌을 하사하였고, 
무술(1418) 세종이 즉위하여 한성부윤을 거쳐 10월에 전주부윤으로 옮겼으나 공은 양친의 이장으로 상소를 올려 부임지에 나아가지 않았고, 신축(1421)년 한성부사에 임명되고 임인(1422)년 2월에 하절사로서 명나라에 다녀와 12월에 개성부유수에 임명되었고 그 후에 승진되었으나 사양하니, 세종이 친히 약을 보내왔다. 
계묘(1423) 9월에 공조판서에 임명되었고, 갑진(1424) 3월에 소관전 1결 50복을 하사하였고 한성부사로 다시 임명하였다. 
7월 명(明) 문제(文帝)가 죽고 인종이 왕위에 오르자 12월에 진하대행존시사(進賀大行尊諡使)로 갔었다. 사신으로 떠날 적에 유의 두벌, 털로 만든 모자와 가죽신을 하사하였으며 을사(1425) 3월에 복명 하였다. 
병오(1426)11월 함길도 관찰사로 나아가고, 12월에 예문관대제학을 겸임하였고 무신(1428) 8월 공조판서에 임명되었다. 
기유(1429) 겨울 하정조사(賀正朝使)로 명나라에 갔다가 경술(1430) 4월에 돌아와 황제의 칙서와 특별히 하사한 왕세자의 조복 한 벌을 가지고 오니, 세종이 이를 가상히 여겨 공에게 말안장을 하사하고 경회루에서 잔치를 베풀어 위로 하였다. 
가을에 의정부참찬에 임명하였고 8월에 호조에서 의견을 수렴할 때 원임 관료가 각기 공법의 가부에 관하여 의논할 때, 공은 좌의정 황희, 우의정 맹사성, 찬성 허조, 참찬 이맹균과 함께 의논하되 토지를 다스리는 것은 조법보다 훌륭한 것이 없으며, 나라의 제도는 세금을 거두는 즈음에 시행하고 있는 수손급손법(收損給損法)은 만세에 시행될수 있는 훌륭한 법이다. 이를 가볍게 고쳐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세종은 그 의논에 따랐다. 
신해(1431) 10월 대사헌에 임명되었고 12월에 상소하여 외방에다가 별도로 사관(史官)을 설치, 당시의 일을 기록하게 할 것과 대간을 전임하여 인재 선발을 공정허고 삼가며, 고적출척(考績黜陟)법을 엄격히 할 것을 청하였다. 
임자(1432) 5월 중추원사에 임명되었고, 6월에는 판한성부, 9월에 다시 중추원사가 되었다. 
계축(1433) 11월 중조사신선위사(中朝使臣宣慰使)로 차송되어 유후사에 갔으며, 갑인(1434) 8월에는 의정부참찬에 임명되어 숭정대부의 품계에 이르렀다. 
병진(1436) 정월 궤장(几杖)을 하사하도록 명하였고, 4월에 예문관대제학에 임명되었으나 공은 노병으로 한가한 곳에서 병을 치료하며 여생을 보낼수 있도록 해주기를 청하였다. 
무오(1438) 에 지중추원사에 임명되었고, 12월 다시 예문관대제학에 임명되었으며 경신(1440) 5월에 판중추원사로 승진되었다. 
갑자(1444) 윤 7월 초 5일 임오에 그의 집에서 세상을 뜨니 향년 81세이다. 
그의 죽음이 조정에 알려지자, 세종은 크게 슬퍼하여 조회를 하지 않고 조문을 보내었으며 부의와 하사품을 특별히 후하게 하였고 장례에 미쳐서는 정평(靖平)이라는 시호를 하사하고 관리를 보내 제사를 올리면서 제문을 지은바 있다. 
 
 
“오직 경의 품성은 온화하고 선량하며, 
몸가짐은 단정하고 정성스러웠다. 
일찍이 급제하여 화려한 벼슬을 두루 거친 바 있다. 
사간원의 우두머리가 되어서는 그의 기품과 절개는 늠름하였고, 
승정원을 맡음에 미쳐서는 임금에게 경계를 하는 바 깊고도 간절하였다. 
사헌부의 우두머리가 되었고 관찰사로서 교화를 베풀었으며 
이르는 곳마다 명성이 있으니, 참으로 훌륭한 신하이다. 
그를 높은 벼슬에 발탁하여 둠에 
 
그를 의지함이 더욱 독실하니, 
어찌 그 노인과 기쁨과 슬픔을 함께 하지 않을 수 있으며. 
어찌 조문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문득 돌아가시니 그 옛덕을 추모하여 봄에 참으로 슬픔이 크다.“ 
 
 
위의 제문에서 성상의 총애가 두터웠고 매우 슬퍼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부인은 정경부인 성산이씨 판윤 밀(謐)의 딸로서 두 딸을 낳았을 뿐 아들이 없었다. 종제 직장 서(庶)의 아들 계종(繼宗)으로 양자를 삼으니, 그의 벼슬은 집현전 대제학이었는데, 단종이 양위 하였을 때, 벼슬을 그만두고 운봉의 깊은 산골에 은거하니, 그가 곧 귀은공(歸隱公)이다. 덕림원(德林阮)에 배향되어 있다. 
그의 큰 딸은 군수 기진덕에게, 차녀는 감사 김수(金修)에게 출가 하였다. 
선생은 대대로 문헌이 있는 집안에 태어나 소박한 바탕이 두터웠음으로 크게 남다른 바 있었다. 더욱이 밝은 세대를 만나 화려한 벼슬을 두루 거친 바 있다. 
사간원의 우두머리가 되어서는 사실을 알면 말하지 않은 바 없어, 당시의 폐단을 적중하였고, 관찰사로 나아가서는 가르침을 받들어 교화를 폄에 다스림이 넉넉하여 군국의 기무에 동참하였다. 
그리고 네 차례나 중국사신으로 들어가 험난한 사신 길을 꺼리지 않고 사신의 직무에 정성을 다하였다. 
<시경>에 이르기를 왕의 나라, 주나라에 근간이 되는 인물이 태어났다는 것은 바로 선생을 두고 말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세대가 멀어짐으로써 공의 사적을 충분히 증거할 수 없었는데, 후손 병춘(炳春), 병묵(炳黙)등이 역사서와 실록에 기재된 것을 찾아내어, 이를 두 책으로 엮어 간행 배포 하였다. 
또한 공의 묘소를 잃어 버렸다 되찾아 신도비를 세우고자, 그의 본손 일상(馹相)과 유림 김동섭 등이 나를 찾아와 신도비문을 부탁하였다. 나는 외진곳에 사는 사람으로 병든 몸에 겨우 목숨을 지탱하고 있는데, 공의 행장을 살펴보니, 더욱 느낀 바있어 마침내 붓을 잡아 삼가 그 전말을 기록하고, 이에 명을 붙이는 바이다. 
 
 
아/ 빛나신 선생이여 
 
덕행이 고매 하여라/ 
빼어난 위엄, 세상 덮으시어 
호걸스런 인물, 하늘이 내려 주셨내. 
해치려 하지도 
 
욕심 내지도 않으시고 
 
그 마음 지극히 공정 하였어라/ 
조정의 바른 인물로 
말에는 충성을 다 하였다. 
태자를 보좌함에 
바른 사람 곁에 두게 하였고. 
불교를 배척함은 
진리를 어지럽힐까 걱정 함이어라 
진실 그 하나일 뿐, 다른 마음 없어 
그 마음 빛나고 빛났어라. 
후손에게 넉넉함 전해주고 
옛 사람 학문 따랐네. 
 
옛 이윤 으로서도 
 
아름다움 독차지 하지 못할 제 
 
백세 먼 훗날 
선생의 기풍 듣고 흥기 하리라. 
이에 비문 새겨 
영원히 전하나니 
 
저 산등성 기슭이여 
천지와 길이 함께 하리라. 
 
 
후학 통정대부 전 행 홍문관 시강 지제고 원임 비서감 서랑 문소 김홍탁 삼가 지음 
 
(通情大夫 前 行 弘文館侍講 知制誥 原任 秘書監 書郞 聞昭 金鴻洛 謹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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