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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참의공 오정(10세)
작성자 관리자 [2021-07-06 09:2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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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조참의공 묘정 사적비문(戶曹參議公 廟廷 事蹟碑文)

                고종갑자 십일월 입(高宗 甲子 十一月 立)


근본을 돈독히하고 지나간 먼 일을 그리워함은 백세의 두터운 정의에서 나왔고 실전(失傳)된 것을 다시 찾음은 더욱 천리(天理)가 뚜렷하게 나타났음을 볼 수가 있다.  

생각하건데 우리 21대조이신 시중 문헌공 휘 대승은 동복현의 남쪽에 돌을 다듬어 48등을 만들고 밤마다 점등하여 하늘에 예배하였더니 그 뒤에 자손이 번성하여 만연하고 관직이 연이어 계속 뒤를 이었다.  

휘 광찰은 인명전 시위대장군이니 향년이 89세요. 휘 선은 도첨의 찬성사로 시호는 문정(文靖)이며, 휘 천은 삼사우윤이니 시호는 문명(文明)이요. 휘 윤후는 판전객시사로 치사하였고, 휘 식은 수문전 대제학이니 시호는 문간(文簡)이요. 휘 천경은 이조참의인데 만년에 배천에 물러나 쉬시었으니 향년은 82세요. 휘 정(侹)의 관직은 호조참의이니 향년이 92세이시다.  

세 아드님을 두시었는데 가인,가의,가례이시다.  

문헌공 이하로부터 모두 9세 사이에 나란히 높은 관직을 지내고 또 오래 수명을 누리었으며 그 뒤에 만취와 묵제공은 함께 명절(名節)과 문장이 있었고 죽남, 동암, 인주공은 명망이 당세에 드러났으며 또 귀사, 동사, 수촌, 휴곡의 제공에 이르러서도 또한 명망이 한 시대에 드러났고 나란히 대관에 있었으니 그 석등을 밝히어 하늘에 예배한 정성이 아니었으면 후대에 증험이 있었겠느냐?  호조참의공(戶議公)의 묘소는 임진왜란의 병화를 만난 

 

뒤에 실전하였는데 수촌공이 호남을 안절하여 문헌공의 묘소를 동복에 성추 하시고 비록 간략하게 사적을 묘석에 기술하였어도 문헌이 존재하지 않아 징험할 수가 없다.

 

 

정종(正宗)병오(丙午)1786년에 후손 석명(錫溟)이 종중의 의논으로 김제의 월산에 가서 살피다가 공의 외손인 양성 이징세(陽城 李徵世)를 만나고 또 공의 여서 권양(女婿 權讓)의 분묘를 같은 등성이의 아래에서 찾아 파보았더니 지석이 나왔는 데 아랫변이 없는 오자(吳字)와 인변이 없는 정(侹)자가 있어 비로서 징험하고 믿어 의심이 없었으며 따라서 수호한 지가 벌써 80여년에 이르렀다.  

금상의 원년 4월에 소자가 등제하여 특별한 은혜로 홍문관교리를 제수하고 돌아와서 바로 호남에 과시(科試)를 관장하는 명을 받들고 지나다가 묘소를 살피었다.  

대저 묘소의 좌우에 남몰래 장사한 자에게 즉시 모두 파내라고 명한 뒤에 모든 종인들을 모이게 명하고 드디어 향사 하였다.  

생례(牲醴)의 예가 정결하게 갖추어지니 신명(神明)이 감동하는 것 같고 돌리는 술잔이 단란하여 질애(耋艾)가 모두 다 기뻐하니 이것 또한 오씨의 성대한 거사이다.  

마침내 하룻밤을 묵고 발정하려고 하였더니 전주에 있는 족인 학영이 말하기를 <묘소를 찾은 지 여러 해가 되었는 데 갈석에 사적을 기록함이 없으면 어찌 또 전일에 근심이 없었다고 알겠습니까? 여러 종족이 재화를 모아 돌을 다듬어 갈고 닦은 지가 오래 되었으니 청컨대 실지의 사적을 기록하여서 후세 사람이 눈으로 보고 느끼게 하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고 하니  

아/ 실전 하였다가 다시 찾은 것은 천도에 부신(孚信)이 있음을 알만하고 지나간 먼 일을 그리워하며 태어나게 된 근본을 잊지 않고 보답함은 바로 오늘에 와서 성묘하는 데 있으니 내가 어찌 감히 사양하리오.  

마침내 짧은 문장을 기술하여 학영에게 보내 돌에 새겨 오래도록 전하게 할 뿐이다.  

                14대손  통훈대부   홍문관교리   덕영 씀  

                15대손  통사랑 본도 경기전참봉  철상 씀  

 

                15대손                          현상 전서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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