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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문제공 귀성군 오잠
작성자 관리자 [2021-07-06 09:2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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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성군 잠 묘지명 병서(龜城君 潛 墓誌銘 幷序)

 


 

 

중대광 전첨의찬성사 우문관 대제학 감춘추관사 판총부사(重大匡 前僉議贊成事 右文館 大提學 監春秋館事 判摠部事) 귀성군(龜城君) 오기(吳祈)의 자는 흥우(興雨)요. 석명은 잠(潛)이요. 호는 동헌(東軒)이니 동복인(同福人)이다.  

부는  광정대부 첨의시랑 찬성사 판도랑사 상호군(匡靖大夫 僉議侍郞 贊成事 判圖郞事 上護軍)으로 치사한 휘(諱)선(璿)이요.  

모는 안강군 대부인 안씨(安康郡 大夫人 安氏)니 금오위 정용별장(金吾衛 精勇別 將) 휘(諱) 부지(孚之)의 따님이며,  

처는 이천군 대부인 신씨(利川郡 大夫人 申氏)니 통의대부 판예빈사사 춘궁 시독학사 수사관 수찬관 지제고(通議大夫 判禮賓寺事 春宮 侍讀學士 修史館 修撰官 知制誥) 휘(諱) 욱(頊)의 따님으로 2남을 낳았으니, 장남은 승봉조 내부사승(承奉詔 內府寺承) 길(佶)이니 공보다 먼저 죽었고 밀직부사(密直副使) 백서경(伯瑞卿)의 장녀에게 장가들어 2녀를 낳으니 대구인(大邱人)이요.  

차남은 전좌랑 지유 신호위 보승낭장(前左郞 指諭 申虎衛 保勝郎將) 선(僐)이니 밀직사 우부승지 상호군(密直司 右部承旨 上護軍) 송진(宋瑨)의 차녀에게 장가들어 5남과 3녀를 낳았으니 여산인(礪山人)이다.  

공은 기미(1259)년에 출생하여 1275년에 진사에 오르고 1279년에 병과에 급제하고 1280년 5월 천장병과에 급제하여 비서교서랑(秘書校書郞)을 제수하고 자급을 따라 액정내알자. 상승직장. 사재주부. 첨사부주부. 사직당후관. 종묘승. 통례문지후. 소부승. 감찰사. 예문사인. 내의조봉판도좌랑. 동경판관. 상사조봉도관좌랑. 국학직송. 전중시사를 엮임 하였다.  

충렬왕 1년 (1297)년 8월에 교동(喬桐)에 귀양갔으나 10월에 경사(京師)에 돌아왔다.  

충렬왕 2년 (1298)년 정방(政房) 들어오고 12월에 기거랑(起居郞)을 제수하였고,  

충렬왕 3년 (1299)년 조현대부(朝顯大夫)에 가자되어 도첨의사인. 직보문각지재고. 군부총랑. 보문각시제. 전리총랑. 문한시송관. 수찬관지제고를 제수하고, 12월 조봉대부(朝奉大夫)에 가자되어 밀직사 좌부승지(密直司 左部承旨). 비서윤지제고(秘書尹知制誥)가 되었다.  

충렬왕 4년 (1300)년 3월에 성균시(成均試)를 관장하여 김남운등 80인을 뽑고 7월에 조의대부(朝議大夫)에 가자되어 밀직사지신사 지제고(密直司 知申事 知制誥). 지감찰사사(知監察司事)가 되고, 12월에 국학대사성(國學大司成)을 더하였다.  

충렬왕 5년 (1301)년 5월에 문한내학상호군(文翰內學上護軍)에 가자되고 9월에 봉익대부(奉翊大夫)에 가자되어 동지밀직사사 문한사학 응지상호군(同知密直司事 文翰事學 應旨 上護軍)이 되었다.  

충렬왕 6년 (1302)년 1월에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가 되고, 4월에 지자거시(知資擧試)가 되어 최응(崔凝)등 33인을 뽑고, 7월에 감찰대부(監察大夫)에 가자되고, 10월에 광정대부(匡靖大夫)에 가자되어 지도첨의사사사 보문각 대사학 동제수사 상호군(知都僉議使司事 宝文閣 大司學 同堤修史 上護軍)이 되었고,  

충렬왕 7년 (1303)년 윤5월에 정당문학 연영전 대사학(政堂文學 延英殿 大司學)을 더하였으나, 8월에 참소를 입어 원나라에 입조 하였다.  

충렬왕 8년 (1304)년 12월에 장안 경조부(長安 京兆府)에 귀양가 살며 한인 엄씨(漢人 嚴氏)의 딸을 얻어 일남을 낳으니 이름은 눌(訥)이다.  

1310년에 변량에 옮기었다가 1312년 8월에 성지(聖旨)로 환도하여 충선왕을 수종하니 이름을 잠(潛)이라 내려 주었다.  

충선왕 2년 2월에 광정대부 밀직사사 판전의사사 예문관대제학 지춘추관사 상호군(匡靖大夫 密直司事 判典儀寺事 藝文館大提學 知春秋館事 上護軍)이 되고,  

3월에 총부전서(摠剖典書)를 더하고,  

5월에 충선왕을 수종하여 환국(還國)하고,  

7월에 헌부전서 상호군(獻剖典書 上護軍), 판전교사사(判典校事事)를 더하고  

12월에 첨의평리 상의회의 도감사 상호군(僉議評理 商議會議 都監事 上護軍)을 더하고,  

충선왕 3년 (1314)년 1월 삼사사 상호군 상의회의 도감사(三司使 上護軍 商議會議 都監事)를 더하여,  

윤3월에 정윤(正尹)에 옮기고,  

1316년 1월에 우윤(右尹)에 옮기고,  

충선왕 6년 (1319)년 2월에 중대광 귀성군(重大匡 龜城君)을 더하여,  

충선왕 7년 (1320)년 11월에 예문관 대제학 중대광 첨의찬성사 지제고 지춘추관사 상호군(藝文館 大提學 重大匡 僉議贊成事 知制誥 知春秋館事 上護軍)을 더하고,  

1321년 1월에 중대광 첨의찬성사 우문관사 제학 감춘추관사 판총부사 귀성군(重大匡 僉議贊成事 右文館事 提學 監春秋館事 判摠剖事 龜城君)을 더하고,  

4월에 충선왕을 수종하여 원나라에 입조하였다.  

1324년 2월에 대도(大都)에 있으며 좌면(坐免)되고,  

1330년 7월에 환국하여,  

1336년 8월 20일에 78세에 병환으로 사저에서 죽으니 9월 초4일에 대덕산(大德山)동쪽 기슭에 예장(禮葬)하였다.  

그의 아들 선(僐)이 선친의 소탁이라며 묘지(墓誌)를 청하므로 간략하게 시종을 서술하고 기록하여 명(銘)하니,  

그명에 이르기를  

< 당당(堂堂):(위엄스럽고 훌류한 모양)한 인걸이며  

  교교(矯矯):(높이 뛰어난 모양)한 시대의 영웅이로다.  

  덕은 겸비하지 않음이 없고 재주도 통달하지 않음이 없네.  

  조정의 고관을 역임하고 참여 하였으니 시중(侍中)은 다같이 바    라는 것이네.  

  한가한자는 무롱(無弄)함이 교묘하게 소청하여  

  공을 배반하였네.  

  귀양가 경조(京兆)에 거처하니  

  아득하게 해동(海東)을 바라보았고    

  하늘의 요얼(妖蘖)을 도망할수 있었으니  

  임금님의 청문(聽聞)을 얻었네.  

  특별히 사유(赦宥)하는 조서를 기리었으니  

  은혜는 종사에 돌아옴을 허락 하였네.  

  이그러진 달이 다시 둥글었고 쇠잔한 불빛이 다시 밝아졌네.  

  아상(亞相)에 올라 그치었고 갑자기 유궁(幽宮)을 보존 하였네.  

  관직은 덕을 갚지 못하였고 작위(爵位)는 공을 갚지 못하였네.  

  사람은 남긴 한이있고 나라에는 드러난 용모가 없으니,  

  누가 그 책무를 맡을꼬/  막막한 푸른 하늘이여---->  

                      대제학 저헌 윤혁(大提學 樗軒 尹奕)지음  

 


 

 

 

 


간신 김원상(金元祥석천보(石天補) 등과 함께 왕이 연락(宴樂)을 좋아하는 것을 미끼로 전국에서 명기들을 뽑아들이고, 〈삼장사 三藏寺〉와 〈사룡 蛇龍〉 등의 노래를 지어 가무를 관람하게 하는 등으로 환심을 샀다.

그 뒤 지신사(知申事)·지밀직사사·감찰대부 등을 거쳐 지도첨의사사(知都僉議司事)에 올랐으나, 항상 충렬·충선 부자를 모함하여 이간시켰고, 어진 신하들을 모함하고 살해하여 많은 원망을 샀으나 화가 두려워 말하는 자가 없었다.

뒤에 김심·오감량(吳監良) 등에 의하여 원나라에 압송되어 안서(安西)에 유배되었다. 충선왕 때 다시 등용되어 예문관대제학이 되었고, 1313년(충숙왕 즉위년)에는 첨의평리(僉議評理)·상의회의도감사(商議會議都監事)에 올랐으며, 그 이듬해에는 삼사사(三司使)가 되었다. 1320년 찬성사가 되고 이어 구성군(龜城君)에 봉해졌다.

1321년 왕이 원나라에 갈 때 따라가서 유청신(柳淸臣)·양안길(楊安吉) 등과 함께 심양왕 고(瀋陽王暠)의 일당이 되어 왕을 모함하였고, 1323년에는 원제(元帝)에게 고려에 행성(行省)을 설치, 국호를 폐하고 원나라의 직속령으로 할 것을 청하는 등 나라에 많은 해를 끼쳤다. 시호는 문제(文齊)이다.

≪참고문헌≫ 益齋亂藁

 

 

 

 

 

 

묘지명은 1825년(순조 25) 오씨 문중 사람들이 경기도 장단군(옛 파주시 진서면) 구정(口井)동의 민가에 수장된 것을 필사한 것으로『동복오씨대동보(同福吳氏大同譜)』(和順, 1980)에 실려 있다. 묘소는 경기도 파주시 진서면 대덕산(大德山) 기슭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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