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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충장공 藥山 吴光運
작성자 관리자 [2021-07-06 09:2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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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광운(吳光運) 1689(숙종15)~1745(영조21) 

   

자字는 영백(永伯),호號는 약산(藥山), 시호는 충장(忠章) 

아버지는 돈영부도정(敦寧府都正) 상순(尙純), 어머니는 광주안씨(廣州安氏) 병조판서 후열(後說)의 딸이다. 

조선 후기의 문신.  

   

-1714년(숙종 40) 사마시를 거쳐,  

-1719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현감(縣監)에오르고 설서(設書)를 역임하였다.
 

연잉군(뒤의 영조)의 서연관(書筵官)이 되었으며 승지를 지냈다.  

-1728년(영조4) 홍문관의 수찬. 교리및 동부승지를 역임하였다.
 

이해 3월에 이인좌(李麟佐) 정희량 등等의 난이 일어나자 당시 봉조사 최규서는 자기의 고향으로부터 급히 서울로 달려와 이들의 반란을 정부에 보고하였다. 

이러한 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정부에서는 확실하게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아무런 대책도 마련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공은 자칭 영조와의 회견을 요구하여 직접 대한 자리에서 강력히 주장하여 아뢰기를, “오늘날의 난이 일어나게 된데에는 반드시 근본적인 동기가 있었을 것이옵나이다. 그런데 난을 보고한지 이틑이 다 되도록 아직까지 국청을 설치하지 않음은 어찌된 일이 옵니까?” 라고 말했다. 

영조는 그제서야 비로소 몸소 국문할것을 작성하면서 특별히 광운을 문사랑(問使郞)으로 선택했다. 그러나 영조는 이러한일이 한결 더 피로하고 또 귀찮았기 때문에 잠시  파해 버리려 했다. 

이렇게 되자 광운은 또 영조에게. 

“성체(聖體)의 하룻밤 수고는 작은 것이옵고 종사의 만년 근심은 큰것 이옵나이다” 라고 말하며, 끝까지 친히 국문해 줄것을 요청하여 마침네는 정상을 얻어내고야 말았다. 

이와 동시에 서울 안에는 삼엄한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이렇게 되자 당시 사람들은 비로소 그의 앞을 내다볼줄 아는 선견지명에 탄복해 마지 않았다 함은 말할 나위도 없는 일이거니와 적이 평정된 뒤 당시 도원수로 활약하였던 오명항(吳命恒)은 영조에게 말하기를, 

“오광운은 사직을 붙잡은 공로가 있사옵니다, 그러하오니 마땅히 공신에 책봉함이 옳을까 하나이다.” 하고 공신에 책봉할것을 주청 하였으나, 광운은 이것마져도 극력 사양하여 마침내는 공신의 명부에 오르지 아니했던 것이다, 

또 영조의 탕평책(蕩平策) 하에서 청남(淸南)세력의 정치적 지도자로서 활약하였다. 

-1729년에 올린 상소에서 “무릇 탕평의 근본은 전하가 일심으로 최상의 목표를 세우는데 있습니다. 이에서 행하는모든 시책과 행위는 지극히 공적이어서 사사로움이 없고, 올바르므로 편벽됨이 없게 됩니다.” 라고 하면서, 남(南). 서(西). 노(老). 소(少)를 막론하고 당인(黨人)중에서 명류(名流)로 지칭되는 인물들을 등용 할것을 주장하였다. 

-이해에 영남안핵어사가 되고, 이어 대사헌을 가쳐  

-1737년 대사간이 되었다.
 

-1740년 부사과(副司果)가 되어 이때 소론인 원경하(元景夏). 정우량(鄭羽良) 등과 함께 다시 대탕평론을 내세워 “붕당(朋黨)을 없애되 명절(名節)을 숭상해야 한다,”고 적극 주장 하였다. 

-1743년 예조참판을 역임하고,  

-1744년 사직(司直)을 거쳐 개성유수에 이르렀다
 

그가 대사헌에 있을때의 일이다. 

마침 천변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궁중에서 잔치를 행하려 하자 그는 왕에게 글을 올려, “이처럼 근심스럽고 두려운 때를 당해서는 비록 종사를 위하여 베풀어 드리려던 음식으로라도 굶주린 백성들을 구제하는 기구를 삼아 후세의 법이 되게 하여야 할것 이옵니다” 하고 직언을 하자 영조는 그를 불러들여 곧 자리에서 세자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나라에 곧은 말을 하는 신하가 있게 되면 그 나라는 일어나는 것이요. 이와반대로 곧은 신하가 없게 되면 그 나라는 망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 대사헌을 불러 옷가지들을 하사하는것은 너로 하여금 충성스럽고 정직한 사람을 표창하는 도리를 알게 하기 위함이다” 하고는 곧 이어 친히 쓴 글을 내려 말하기를, “대사헌의 자리를 언제나 바꾸지 말고 계속 그무하면서 참신한 기풍을 진작 하기를 선정 조광조와 같게하라” 라고 당부 하기도 했다. 

이러한 그는 어느날 영조에게 아뢰기를, 

“신은 살아서는 남인이니 북인이니 또는 노론이니 하는 테두리 안의 사람은 되지 아니 할것이오며, 죽어서는 공명과 이록(利祿)밖의 귀신이 될것이옵나이다” 라고 자기의 고고한 뜻을 나타내기도 하였다. 

어려서부터 문장에 뛰어났으며, 유형원(柳馨遠)의 저서인 <반계수록(磻溪隧錄)>의 서문을 썼다. 

저서로는 <약산만고(藥山漫稿)>가 있다. 이조판서와 대제학에 추증되었다. 

정조때 영의정(領議政) 번암(樊巖) 채제공(蔡濟公)의 스승이었다. 

조상께서 힘써 세운것을 잘 지켜달라는 아들에게 준 계자서(戒子書)가 있다.

(이조실록)
 

적(賊)이 청주성(淸州城)을 함락시키니, 절도사(節度使) 이봉상(李鳳祥)과 토포사(討捕使) 남연년(南延年)이 죽었다. 처음에 적 권서봉(權瑞鳳) 등이 양성(陽城)에서 군사를 모아 청주의 적괴(賊魁) 이인좌(李麟佐)와 더불어 군사 합치기를 약속하고는 청주 경내로 몰래 들어와 거짓으로 행상(行喪)하여 장례를 지낸다고 하면서 상여에다 병기(兵器)를 실어다 고을 성(城) 앞 숲속에다 몰래 숨겨 놓았다. 이에 앞서 성안의 민가에서 술을 빚으니, 청주 가까운 고을 민간에 적이 이르렀다는 말이 무성했다. 병사(兵使) 이봉상을 보고 말한 자가 있었으나 이봉상이 믿지 않고 설비를 하지 않으니, 성안의 장리(將吏)로서 적에게 호응하는 자가 많았다. 이날 밤에 이르러 적이 이봉상이 깊이 잠든 틈을 타 큰 소리로 외치며 영부(營府)로 돌입하니, 영기(營妓) 월례(月禮) 및 이봉상이 친하게 지내고 믿던 비장(裨將) 양덕부(梁德溥)가 문을 열어 끌어들였다. 이봉상이 창황하게 침상 머리의 칼을 찾았으나, 찾지 못하자 적이 끌어내 칼로 위협했다. 이봉상이 크게 꾸짖기를,  

“너는 충무공(忠武公) 집안에 충의(忠義)가 서로 전해져 오고 있음을 듣지 못했느냐? 왜 나를 어서 죽이지 않으냐?”  

하고 크게 세 번 외치니, 드디어 죽였다. 군관(軍官) 홍임(洪霖)이 변을 듣고는 돌입하여 이봉상 위에 엎드리며 말하기를,  

“내가 진짜 절도사다.”  

하니, 적이 끌어내어 항복하라 협박했으나, 그는 끊임없이 욕을 퍼부었다. 이인좌가 탄복하면서 말하기를,  

“이는 충신이다. 죽이고 싶지 않지만 나를 죽일까 염려되기 때문에 죽인다. 그러나 일이 성사된 후 너의 후손을 녹용(錄用)하겠다.”  

하였다. 홍임이 다시 꾸짖기를,  

“나에게는 본디 아들이 없지만 있다 하더라도 어찌 너 같은 역적에게 등용되겠느냐?”  

하고는 드디어 죽었다. 적이 또 진영(鎭營)에 들어와 영장(營將) 남연년(南延年)에게 항복하라 협박하기를,  

“네가 만약 항복하면 장차 크게 등용하겠지만 항복하지 않는다면 참(斬)하겠다.”  

하니, 남연년이 꾸짖기를,  

“내가 나라의 후한 은혜를 입었고 나이 70이 넘었는데, 어찌 개새끼 같은 너희를 따라 반역을 하겠느냐?”  

하였다. 적이 꿇어앉지 않는 데 노하여 칼로 무릎을 쳤으나, 끝내 무릎을 꿇지 않고 말하기를,  

“어서 내 머리를 베어라.”  

하면서 끊임없이 꾸짖다가 죽었다. 우후(虞候) 박종원(朴宗元)은 상당 산성(上黨山城)에 있었는데 적이 부르니, 박종원이 투항하였다. 이인좌가 자칭 대원수(大元帥)라 위서(僞署)하여 적당(賊黨) 권서봉(權瑞鳳)을 목사(牧使)로, 신천영(申天永)을 병사(兵使)로, 박종원(朴宗元)을 영장(營將)으로 삼고, 열읍(列邑)에 흉격(凶檄)을 전해 병마(兵馬)를 불러 모았다. 영부(營府)의 재물과 곡식을 흩어 호궤(犒饋)하고 그의 도당 및 병민(兵民)으로 협종(脅從)한 자에게 상을 주었다. 이봉상은 충무공이순신(李舜臣)의 후손으로 임금이 그 충성을 가상히 여겨 좌찬성(左贊成)을 추증했다. 시호는 충민(忠愍)이며, 청주(淸州)에 사당을 세우고 표충사(表忠祠)라 사호(賜號)했다. 남연년에게는 좌찬성을 추증했는데,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홍임(洪霖)에게는 호조 참판(戶曹參判)을 추증하였고 그 마을에 정표(旌表)하였다.  

【태백산사고본】  

【영인본】 42책 17면  

【분류】 *인사-관리(管理) / *변란-정변(政變) / *윤리-강상(綱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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